Melomiri

그는 내 낙태 동의서에 서명해 주었다

Language: ko

산부인과로 정기 검진을 가던 날, 나는 도현을 마주쳤다. 아침까지만 해도 회사에 급한 일이 있다며 핑계를 대고 집을 나섰던 남자가, 지금은 임신한 입양 여동생의 곁을 지키며 지극정성으로 보살피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종이 한 장을 내밀며 말했다. “마침 잘 만났네. 여기 사인해 줘.” 양심에 찔리는 구석이 있었는지, 그는 내용을 확인하지도 않은 채 서둘러 서명을 하고 나서야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제부가 출장 중이라 서아가 혼자 검진받기 힘들대서 왔어. 당신이 또 예전처럼 예민하게 굴까 봐 회사 일 핑계 댄 거야.” 이제 막 임신한 서아의 발걸음은 걱정되면서, 임신 5개월 차인 내가 혼자 병원을 찾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은 남자. 실소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예전처럼 악을 쓰며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저 묵묵히 몸을 돌렸을 뿐이다. 나의 비정상적인 차분함에 당황했는지, 도현이 다급하게 내 뒤를 쫓아오며 물었다. “참, 방금 사인하라고 한 거, 무슨 서류야?” 나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대답했다. “임신중절 수술 동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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